후지모리 vs 산체스, 페루의 운명 가를 '광부 표심'
사상 초유의 투표용지 배송 차질과 관리 부실로 얼룩졌던 페루가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 선출을 위한 결선 투표를 시작했다. 지난 1차 투표 과정에서 수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참정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이번 선거는 단순한 정권 교체를 넘어 붕괴된 국가 선거 시스템의 신뢰도를 회복해야 하는 무거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수도 리마를 비롯한 주요 도시의 투표소에는 이른 새벽부터 유권자들이 몰려들었으나, 지난번과 같은 행정 오류가 반복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현장을 지배하고 있다.이번 결선은 보수 진영의 게이코 후지모리 후보와 진보 진영의 로베르토 산체스 후보가 맞붙는 극명한 이념 대결의 장이다. 후지모리 후보는 치안 강화와 외국인 투자 유치를 통한 경제 활성화를 약속하며 우파 세력을 결집하고 있으며, 이에 맞서는 산체스 후보는 부의 재분배와 국가 주도의 복지 확대를 내세워 서민층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두 후보의 지지율 격차가 오차범위 내에서 접전을 벌이고 있어, 어느 쪽이 승리하더라도 선거 과정의 공정성을 둘러싼 뒷말이 무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혼란의 시작은 지난 4월 치러진 1차 투표 당시 35명이 넘는 후보가 난립하며 제작된 거대 투표용지였다. 피자 박스에 비견될 만큼 거대했던 용지는 그 자체로도 화제였으나, 진짜 문제는 이를 투표소까지 전달하지 못한 민간 배송업체의 무능이었다. 리마 남부 지역에서는 투표용지가 도착하지 않아 6만 명 이상의 유권자가 발길을 돌려야 했고, 이는 선거 결과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사태의 책임을 지고 선관위원장이 사퇴하는 등 행정 공백까지 겹치며 페루의 민주주의는 큰 상처를 입었다.
부정 선거 의혹을 증폭시킨 사건은 개표 과정에서도 터져 나왔다. 리마 시내 쓰레기통에서 버려진 투표함이 발견되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면서 시민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비록 국제 선거 감시단이 조직적인 부정의 증거는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이미 바닥으로 떨어진 선거 관리 당국에 대한 신뢰는 쉽게 회복되지 않고 있다. 1차 투표 이후 최종 결선 진출자를 확정하는 데만 한 달 가까운 시간이 소요된 점 역시 정치적 불확실성을 키우는 악재로 작용했다.

이번 선거의 최후 승자를 결정지을 핵심 변수로는 약 50만 명 규모의 비공식 광부 집단이 지목된다. 페루 경제의 근간인 금 생산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생존권과 직결된 광업 규제 및 자원 배분 정책에 따라 전략적인 투표 성향을 보여왔다. 두 후보 모두 이들의 표심을 잡기 위해 파격적인 공약을 내걸고 있어, 광산 지역의 개표 결과가 전체 판세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이들의 선택은 향후 페루의 자원 외교와 경제 정책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다.
전문가들은 투표가 무사히 끝나더라도 당선자가 직면할 정치적 가시밭길을 우려하고 있다. 선거 과정 전반에서 드러난 행정적 결함과 정통성 시비는 차기 정부의 국정 동력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대통령이 수시로 교체되는 극심한 정치 불안을 겪어온 페루 사회가 이번 결선 투표를 통해 갈등을 봉합하고 통합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결국 이번 선거는 페루가 민주적 절차의 공정성을 다시 세울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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